확신하는 두 가지 진실

확신하는 두 가지 진실

Thinker
모건 하우절
카테고리
투자철학
태그
돈의 심리학
Date
2023년 02월 25일
《돈의 심리학》으로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모건 하우절(Morgan Housel)이 3년 전 썼던 블로그 글입니다. 원제는 "Two things we know with high confidence"입니다.
3년 전, 2020년 3월 16일이라면 코로나19가 막 글로벌 팬데믹으로 확정되기도 했고, 한국 주식시장이 저점을 기록했던 때이기도 합니다. 3년이 지나서 돌아보니, 모건 하우절이 말한 것처럼 "비관주의의 도가 지나쳤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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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는 두 가지 진실

 
모건 하우절
2020년 3월 16일
 
번역: generalfox(파란색 글씨: 역자 주)

아무리 좋은 시절이라도 아는 것(knowns)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unknowns)이 더 많다.
현재 알려지지 않은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 누구도 지금 내년을 예측하는 능력이 작년의 예측 능력보다 뛰어나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 변화의 속도가 예측의 정확도를 결정하므로, 앞으로 몇 시간 내에 어떤 새로운 정책이 도입될지 알 수 없다면 앞으로 펼쳐질 한 해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끊임없이 예측을 갱신하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에 뒤처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와 관계없이 계속 진실로 남을 것이라 확신하는 몇 가지 사실에 집중하라.
그중 두 가지 진실을 알아보자.
1.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 의지는 곧 폭발할 것이다.
이윤이 상황을 개선하려는 동기이기에 자본주의가 작동한다. 생명의 지속이든 경제적 의미에서든 생존이 동기가 될 때 그 힘에 발동이 걸린다.
나심 탈레브는 "곤경에 과잉 반응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이 바로 혁신이다"라고 썼다.
대공황 때로 돌아가 보자. 경제학자 알렉산더 필드(Alexander Field)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29~1941년은 전반적으로 볼 때 미국 경제사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진보한 13년이었다." 1930년대의 생산성 증가 속도는 1920년대와 비교해 두 배나 빨랐다.
1920년대는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여유가 있었던, 여가(leisure)의 시대였다. 1930년대는 사람들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필사적인 문제 해결(frantic problem solving)의 시대였다.
대공황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경제적 고통을 가져왔다. 대공황은 또한 슈퍼마켓과 전자레인지, 자외선 차단제, 제트기, 로켓, 전자 현미경, 자기 녹음(magnetic recording), 나일론, 복사기, 테플론(teflon), 헬리콥터, 컬러 TV, 플렉시 글라스(plexiglass), 상업 비행, 거의 모든 종류의 플라스틱, 합성 고무, 자동 세탁기를 포함한 수많은 발명품도 가져왔다.
제2차 세계 대전도 마찬가지다. 이는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동시에 빠른 발명을 불러온 6년이었다. 전쟁은 기마 부대에서 시작해 원자를 반으로 쪼개면서 끝났다.
역사학자 프레더릭 루이스 앨런(Frederick Lewis Allen)은 1952년에 쓴 글에서 전쟁 중에 폭발한 과학의 진보를 묘사한 바 있다.
전쟁 중에 정부가 끊임없이 외쳤던 것은 사실상 다음과 같다. "우리가 발견한 이것과 저것이 전쟁의 승리를 불러올 가치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 발견을 발전시켜 상용화하라! 비용은 무시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은 페니실린부터 레이더와 원자력에 이르는 모든 것을 탄생시켰다. 이 모든 아이디어는 적어도 서류 상으로는 전쟁 전에 대부분 발견되었다. 하지만 생사를 다투는 절박한 상황이 급속도로 개선과 적용을 촉발했다. 일부에서는 한 세대에 걸쳐서나 이뤄낼 만한 기술적 진보를 단 몇 달 만에 완성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느긋한 비전(vision)보다는 공포가 유발한 필요성에 의해 탄생한다. 이는 오랫동안 진실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확신한다.
2. 실제 일어나는 피해보다 더 많이 걱정한다. 비극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된다.
중병에 걸릴까 걱정하는 사람이 실제 중병에 걸리는 사람보다 더 많다.
해고당할까 걱정하는 사람이 실제 해고당하는 사람보다 더 많다.
망할까 걱정하는 기업이 실제 망하는 기업보다 더 많다.
언제나 그랬다.
격변은 보통 안주(安逸)에서 시작해 과잉 반응으로 모습을 바꾼다. 이 두 가지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는 것이 차분하게 그 발생 가능성을 계산하는 것보다 쉽다. 그 일의 결과가 극도로 좋거나 극도로 나쁠 때는 발생 가능성을 잘못 계산하기도 쉽다.
시장이 회복하는 와중에는 (시장이 계속 상승하리라는) 보상을 꿈꾸며 즐거워지기에 그 결과가 반드시 일어나리라고 믿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반대 방향도 마찬가지다. 잃을 것이 많기에(아는 사람들이 죽는다거나 해고당한다거나) 나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에 대비해야 한다고 믿기 마련이다.
실제 피해를 넘어서는 걱정은 시간이 지나고 돌아봤을 때 실제 필요했던 만큼을 넘어서는 큰 고통을 초래하기에 비극적이다.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인 사람이 주위를 둘러보며 '세상에, 상황이 이렇게 심각하다니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때가 올 것이며, 1년 후에는 과거를 돌아보며 '예상했던 것만큼 심각해지지 않았으니, 그때 그런 생각을 안 했어야 했다'라고 말하는 때가 올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그 지점에 다다랐는지도 모른다. 물론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비관주의의 도가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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