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힘든 실화, 투자자 리루의 일대기

믿기 힘든 실화, 투자자 리루의 일대기

Thinker
리루
카테고리
투자자
태그
찰리 멍거
히말라야 캐피털
Date
2023년 11월 28일
리루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파이낸셜 타임스》 기사를 번역했습니다. 리루에게는 성공한 투자자, 찰리 멍거가 선택한 투자자라는 명성 이면에 1989년 천안문 광장 시위를 주도했던 운동권 학생이라는 역사도 있습니다. 과연 그는 '변절자'일까요? 다소 비판 어린 균형 잡힌 시각에서 그의 일대기를 조명한 기사입니다.
 
1989년 6월 3일 천안문 광장의 리루. 다음날 중국군이 민주화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1989년 6월 3일 천안문 광장의 리루. 다음날 중국군이 민주화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믿기 힘든 실화, 투자자 리루의 일대기

천안문에서 탈출한 급진주의자가 중국에 투자해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다
 
엘리너 올컷Eleanor Olcott, 《파이낸셜 타임스》
2023년 9월 7일
번역: generalfox(파란색 글씨: 역자 주)

1989년 봄, 학생들로 가득 찬 기차가 베이징에 도착했다. 객실의 짐칸과 좌석 밑까지 승객이 들어찼다. 중국 수도에 도착한 이들은 유명한 개혁주의 지도자의 사망이 촉발한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23세의 청년 리루도 그 무리에 있었다.
호리호리하고 안경을 쓴 난징대학교 재학생 리루는 승차권을 끊지 않고 기차에 올랐다. 베이징역에 도착해 인파 속으로 몸을 숨기려던 그를 제복을 입은 사람이 멈춰 세웠다. 리루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까 우려했지만, 검표원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웃는 표정으로 시위에 대한 지지를 표하고는 그냥 지나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선처에 고마움을 느끼며 그는 군중을 따라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천안문 광장을 직접 보기 전에는 그 규모를 가늠하기가 힘들다. 규모가 워낙 커서 평상시에는 태평천국의 문The Gate of Heavenly Peace이 저 멀리 수평선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리루가 도착한 날도 광장은 자유를 요구하는 인파로 가득 찼다. 시위자들은 정치 개혁을 요구했고, 일부는 단식 농성을 계획했다. 시위는 몇 달간 지속했고, 그동안 학생들은 스스로 조직을 구성해 지도자를 선출했다. 리루는 베이징의 명문대 출신이 아닌데도 급진파를 대표하는 지도자 일원이 되었다.
리루는 1966년 4월에 태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그의 부모는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어린 시절을 위탁 가정과 보육원을 전전하며 보냈다. 10살 때 공식적으로 24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탕산 대지진에서 살아남았다. 그를 입양했던 가족도 사망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세대에 이러한 경험을 한 사람은 흔했지만, 리루는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많은 학생이 자기를 외부인으로 여기는 시선을 느꼈다. 선동적인 연설로 의심하는 이들의 마음을 얻는 대신, 막후 인물로 남기로 했다. 시위 조직자 중 하나인 왕준타오Wang Juntao에 따르면 리루는 회의 때 대부분 침묵을 지키며 서로 다른 관점을 흡수했다. 또한 중요 인물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는 베이징대학교의 학생 지도자 왕단Wang Dan과 금방 친해졌고, '천안문 광장 수호 본부'라는 학생 조직의 최고 책임자인 차이링Chai Ling의 마음을 얻었다. 시위자 중 급진적인 편에 속했던 차이링은 리루를 부책임자 중 하나로 임명했다.
일부 학생은 시위의 배후 조직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신분증도 없는 리루가 베이징에 온 것이 의심스럽다며 왕준타오에게 보고했다. 그가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한 것이었다. 과거 여러 시위를 조직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왕준타오는 그러한 의심을 일축했다. 그는 리루에게서 무언가 다른 면을 보았다. 처음 만나 인사하며 악수했을 때 나이가 더 많은 이 운동가는 리루의 거친 손이 학자가 아닌 육체노동자의 것에 가깝다고 느꼈다.
왕준타오는 리루가 학생 조직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학생 대다수는 정부와 협상해 중국의 정치 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리루는 정부 당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가장 공격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5월 중순 6일간의 단식 농성을 조직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는 동정 여론을 조성했지만, 정부의 분노를 샀다.
1989년 6월 내내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하겠다고 선언하는 학생 지도자.
왼쪽부터 차이링, 왕단, 펑충더, 리루. © Reuters
1989년 6월 내내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하겠다고 선언하는 학생 지도자. 왼쪽부터 차이링, 왕단, 펑충더, 리루. © Reuters
 
시위자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리루는 당시 여자친구(자오밍Zhao Ming)와 상징적인 공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그날 찍힌 사진을 보면 그는 지저분한 러닝셔츠와 헐렁한 항공 점퍼를 입은 채 혁명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비스듬하게 목에 둘렀다(아래 이미지 참고, 역자 추가). 친구들은 값싼 술과 아카펠라 축가로 이 행복한 커플의 탄생을 축하했고,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에 담긴 기쁨과 희망은 군중의 사기를 진작했다.
시위 도중에 열린 리루의 결혼식.
시위 도중에 열린 리루의 결혼식.
 
같은 해 5월 말, 천안문 광장에 100만 명이 모였다. 주둔한 경찰과 군대 병력이 늘어나면서 일부 학생은 군대가 광장에 운집한 사람을 해산하려고 준비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했다. 리루와 차이링 측은 광장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던 중 6월 4일 새벽 군대가 진격해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탱크는 시위대가 자고 있던 텐트를 짓밟은 뒤 퇴로를 차단했다. 동시에 군인들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체포했다. 당국은 민간인 20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학생 지도자는 사망자가 최대 3,4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대학살을 자행한 후 정부는 21명의 학생을 반란 주동 혐의로 지명 수배했다. 덥수룩한 흑발에 알이 큰 선글라스를 쓴 리루의 사진이 국영 언론에 자주 등장했기에 그는 잠적하기로 했다.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서 서양의 물건을 밀수하는 경로를 이용해 그는 겨우 홍콩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왕단과 왕준타오는 운이 좋지 않았다. 리루는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지명 수배자 신세였다. 수십 년 후 수억 달러를 들고 그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중국 정부와 관계가 훨씬 복잡해졌다.
 
 
1989년 말 리루는 미국 망명을 허가받았다. 공산주의 중국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뉴욕은 쉽지 않은 곳이었다. 돈도 없고 영어도 할 줄 몰랐던 그는 중국 학생들이 조직한 시위의 의의를 존중하는 인권 운동가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저명한 인권 운동가이자 거대 출판사 랜덤하우스Random House의 최고 경영자인 로버트 번스타인Robert Bernstein이 정착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다른 운동가 트루디 스타일러Trudie Styler(영화 배우이자 제작자로서 특히 환경운동을 펼쳐 왔다)는 중고 의류가 담긴 가방을 선물했다. 옷은 그녀의 남편인 유명 가수 스팅Sting의 것이었다. 스타일러는 나중에 리루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기사를 작성하면서 리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가 설립한 투자회사 히말라야 캐피털Himalaya Capital의 임원 몇 명에게서 그 시기 리루의 생각 변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90년 출간된 리루의 회고록 《Moving the Mountain(이산移山)》은 어릴 때 중국에서 겪은 격동적인 사건을 다뤘다. 몇 년 후 그는 인터뷰에서 그런 일이 자기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했다. "저를 입양한 가족과 동화하려고 노력했고, 그 어떤 환경에도 적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뉴욕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여름방학 내내 영어를 배운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역사상 최초로 경제학 학사와 경영학 및 법학 석사 학위를 동시에 취득한 학생이 되었다. 수업 중에는 조용했지만, 때때로 깊이 있는 질문을 하며 다른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다른 학생들처럼 교수에게 존경심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를 가르쳤던 교수의 말이다. "그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문제는, 그곳이 어디일지였다. 사회 운동가로서 리루는 1991년 미국 의회 의사당 앞에서 15일간 단식 농성을 벌이며 곤경을 겪던 왕준타오 구명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많은 반체제 인사가 중국을 떠날 수 있게 되면서 천안문 사태에 대한 관심은 많이 사그라들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리루는 한 학생 조직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 도착한 후) 여기에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마음 한구석에 늘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미국 자본주의에 관한 속성 교육을 받았다. 워런 버핏의 강연을 들은 후 리루는 학자금 대출을 활용해 주식시장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상당한 수익을 냈다.
1994년 4월 28일 뉴욕의 한 행사장에서.
왼쪽부터 트루디 스타일러, 리루, 리처드 기어, 신디 크로퍼드.
© Dan D’Errico/WWD/Penske Media via Getty Images
1994년 4월 28일 뉴욕의 한 행사장에서. 왼쪽부터 트루디 스타일러, 리루, 리처드 기어, 신디 크로퍼드. © Dan D’Errico/WWD/Penske Media via Getty Images
 
1996년 졸업할 무렵 리루는 학생 운동과 생계를 한 바구니에 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인권에 관심이 많은 뉴욕의 저명인사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뉴요커〉 잡지에 졸업 소식이 실리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에서 입사 제의도 많이 받았지만, 그는 졸업하고 1년이 안 지나서 자기 헤지펀드 회사를 설립했다.
1990년대 미국 경제의 호황을 등에 업고 더 창의적이고 위험 수준이 높은 투자 전략을 구사하는 헤지펀드가 주목받았다. 존 폴슨John Paulson이나 스티브 코언Steve Cohen, 레이 달리오Ray Dalio는 이미 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리루 역시 그 대열에 합류하기를 열망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이 유명 프라이빗 에쿼티 회사인 KKR의 공동창업자 제롬 콜버그Jerome Kohlberg에게 러브콜을 받는 것은 물론, 스스로 투자회사를 설립하는 것도 전례가 없었다. 하지만 리루 같은 인생사를 가진 대학 졸업생은 없었다. 리루의 회사에 투자하기로 한 콜버그는 《뉴욕 옵서버》에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는 이러한 결정을 하지 않지만, 그를 향한 존경심이 앞섰습니다."
리루의 헤지펀드인 히말라야 캐피털은 시작부터 징조가 좋지 않았다. 그는 아시아에서 투자할 기회를 찾았지만,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해 히말라야는 설립 첫 해 19% 투자손실을 기록했다. 얼마 안 가 최대 출자자가 자금을 환매했다. 리루는 데이트레이딩과 공매도에 신물이 났다. 무한대의 하방 위험에 노출될 뿐 아니라 대상 주식의 주가가 급등한다면 소규모 펀드가 종말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는 위기로 인해 폭락한 일본과 한국 주식에 투자해서 손실을 회복했고, 2000년대 중반 운용자산 규모가 1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1인 기업이었던 히말라야는 직원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리루는 중국 반정부 인사 출신으로 미국 투자업계에 뛰어들어 서양 자본주의 가치를 받아들여서 큰돈을 번 독특한 입지의 인물이 되었다. 한 신문사의 표현처럼 '자유의 전사에서 맨해튼 여피yuppie(도시에 사는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로 변신한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1989년 리루는 베이징을 방문한 미국 정부 관료를 향해 "중국 정부와 거래하려는 이기적인 결정"이라는 비판을 퍼부었다. 이제 그는 자기 철학의 변화를 받아들여 중국의 성장에 투자하는 장기 전략을 공개적으로 논하고, 새롭게 등장한 인터넷의 민주화 효과를 찬양했다. 또한 다른 중국 이민자들과도 관계를 쌓았다. 그중에는 1990년대 말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부동산 재벌 시옹 완리Xiong Wanli도 있었다.
2003년 리루는 인권 활동을 통해 알게 된 한 여성의 초대를 받아 추수감사절에 산타바버라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이 여성의 남편은 워런 버핏이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성공한 투자자가 되게 해 준 복합기업 버크셔 해서웨이의 이사였다. 버크셔의 부회장이자 버핏의 오른팔인 찰리 멍거도 식사에 동석했다. 멍거와 리루는 몇 시간 동안이나 주식을 주제로 대화했다. 20년간 지속할 동업 관계는 그렇게 시작했다. 올해 99세이지만 여전히 버크셔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멍거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정말 똑똑하고 자신감 넘치는 청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대리인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으로서 일하는 것에 아주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말 그렇게 보였는데, 저도 그와 똑같은 사람이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죠. 자연스럽게 그와 많은 공감대를 이루었습니다. 그에게 버크셔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그의 생각이 워낙 완고했습니다."
멍거는 그의 삶을 향한 의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저는 혁명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저는 자본주의자입니다. 제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혁명에 가담한 역사가 아니라 자본주의자로서의 소질이었습니다."
처음에 멍거는 버핏 같은 투자자로 거듭나라고 리루에게 조언했다. 아드레날린이 솟는 트레이딩을 버리고 장기 '가치 투자'에 초점을 두라는 뜻이었다. 버핏의 접근법은 수십 년간 성장할 잠재력이 있는 저평가된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중국 출신의 리루는 이전까지 그와는 다른 관점에 바탕을 두었다. "나는 주식시장을 차오위의 희곡 〈일출Sunrise〉에 묘사된, 1930년대 상해에서 서로 속고 속이며 운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유혈이 낭자한 세계로 이해했다." 그가 나중에 《Poor Charlie's Almanack(가난한 찰리의 연감)》 중국어판 서문에 쓴 글이다. 버핏의 철학을 수용하면서 그의 만트라mantra는 '정확하고 완전한 정보'로 변화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완전함'은 때로 히말라야가 리서치하는 기업의 CEO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이 다니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거나 이웃과 대화하는 등 엄청난 노력을 의미했다.
리루가 2004년 새로운 펀드를 조성한 후 멍거는 가족 재산 8,800만 달러를 그에게 맡겼다. 젊은 중국인 펀드 매니저로서는 은택恩澤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자금이 없었다면 월간 수익률을 보여주면서 여기저기서 자금을 모집했어야 할 것이다. 멍거의 말이다. "우리는 아주 아주 긴 시간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높은 수익을 냈습니다. 처음 투자한 8,800만 달러는 4~5배가 되었죠." 예컨대 리루는 일찍이 구이저우 마오타이Kweichow Maotai에 투자했다. 이 증류주 브랜드는 공산주의 혁명 후 중국의 공식 국주國酒로 선정되었다. 중국 경제가 호황을 맞으면서 마오타이는 외국 고위 인사를 초빙한 만찬장에서 건배할 때 마시는 술이자 고위 관료에게 바치는 뇌물로서 사랑받았다. 아시아 투자업계에서 그의 마오타이 투자는 1990년대 후반 애플에 투자하는 것에 비견되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다. 한때 중국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큰 기업이기도 했다. 멍거의 말을 들어보자. "투자 당시 PER(주가순이익배수)이 4~5배 정도밖에 안 되었을 만큼 아주 저렴한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리루는 그야말로 가진 자금을 다 털어 마오타이 주식을 최대한 매수했고,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매년 6월이 되면 천안문 사태의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중국 정부의 1순위 지명 수배자였던 왕단은 1998년 미국 망명을 허가받기까지 9년간 수감되었다. 리루의 동료 운동가는 그의 회고록에서 주연급 역할을 맡았다. 리루의 남다른 손을 알아보았던 왕준타오는 정부 전복 음모죄로 13년형을 선고받았다. 애처로운 과정을 거쳐 중국에서 탈출한 차이링은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다(그녀는 인터뷰 요청에 회신하지 않았다).
1999년 천안문 사태 10주년을 맞아 미국의 한 방송사는 '천안문의 영웅들'을 추적했다. 왕단은 미국 망명 생활을 통해 중국의 변화를 위한 운동에 다시 참여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라고 말했다. "계속 무언가를 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 1990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도 선정되었던 급진주의자 차이링은 다소 퉁명하게 답변했다. "정치 운동가가 되는 것만으로 중국이 변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해야죠. 자그마치 10년을 쏟아부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리루는 다소 다른 견해를 보였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반체제 인사로 여겼지만, 뉴욕 거리에서 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며 사실상 정치 운동에서 멀어졌음을 시인했다.
왕준타오는 올해 65세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전문 혁명가'라고 부른다. 올해 초 뉴욕 플러싱에 있는 사무실에서 전화 인터뷰를 하며 반체제 인사의 삶이 상당한 개인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꽤 단순하다고 말했다. "영웅이 되고자 할 때 자신을 희생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리루 같은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삶이 더 "복잡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삶에는 균형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기점으로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중국을 민주화할 것이라는 예측은 순조로운 경로를 밟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리루는 여전히 정치적 추방자 신세였지만, 투자업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미국과 중국 간 가교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98년 KKR의 콜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리루가 성공해서 중국이 21세기에 걸맞은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하는 데 공헌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는 그때쯤이면 아마 독보적인 위상의 인물이 될 것입니다."
히말라야의 초기 성공 덕분에 그러한 생각이 현실이 되었다. 2002년 리루는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았던 전기 배터리 제조사인 BYD에 투자했다. 그는 선전에 있는 BYD의 공장을 방문할 자격이 없었지만, 중국의 제조 역량과 14억 명에 달하는 소비자의 구매력에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그의 비전은 멍거도 설득했고, 버크셔 해서웨이는 2008년 BYD의 지분 10%를 취득했다. 멍거는 이렇게 회상한다. "저는 자동차 산업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산업에서는 큰돈을 벌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결국 좋은 성과를 냈으니, BYD에 일찍이 투자한 것은 사실상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BYD는 판매량 기준으로 테슬라를 제치고 세계 최대 전기차 제조사로 등극했다.
당시에는 자명하지 않았을는지 몰라도, 자유무역이 중국의 민주화를 앞당길 것이라는 생각은 2008년 8월 8일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때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중국은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이었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중이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인권 단체는 중국 정부의 티베트 탄압과 파룬궁Falun Gong 종교 박해 문제를 조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올림픽 시청 반대 운동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서양 정재계 인사가 잇달아 중국을 방문해 무역과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금융위기로 서양 경제가 붕괴하면서 해외 자본의 중국 유입은 더욱 강화했다. 왕준타오의 말이다. "그때 모두는 6월 4일 대학살을 잊었습니다. 2008년 이후로는 중국 정부와 척을 진 사람이 월스트리트에서 자금을 모집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이러한 거시적 힘으로 인해 이전에는 긴밀하게 결속했던 반체제 인사들이 분열했다. 하지만 왕준타오는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리루와 만나 커피를 마시며 중국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왕준타오가 2006년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학업을 계속하려고 뉴질랜드로 떠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변했다. 그는 2007년 중국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정부는 귀국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그들은 제가 중국에 계속 머무른다면 인생이 비참해질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2008년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이후 리루를 만나지 못했다. "이해합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렸든 관계없이요. 저는 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내가 그에게 접근하면 그의 삶을 방해하겠죠. 우리가 만나서 그저 커피나 한잔하더라도 중국 정부가 그 사실을 즉시 인지할 테고, 선을 넘은 행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플로리다의 포트 로더데일 컨트리클럽에 있는 바의 갈색 가죽 소파에 앉은 시옹 완리는 1990년대 중국에서 "돈을 벌기가 정말 쉬웠다"라고 말했다. 시옹 역시 천안문 시위에 참여했지만, 대다수 '89학번 세대'처럼 계속해서 중국에 머물렀다. 천안문 사태 이후 그는 과거 어촌이었던 선전의 한 마을로 이사했는데, 이곳은 현재 거대도시로 변모했다. 선전의 현재 인구는 뉴욕보다 많은 1,760만 명에 이른다.
국영 건설사에서 몇 년간 일한 후 시옹은 자기 부동산 회사를 설립했다. 선전을 중심으로 생겨난 골프장에서 만난 중앙 및 지방 정부 관료로 이루어진 인맥을 백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당시는 시진핑의 반부패 척결 정책이 시행되기 전이었고, 정재계 인사 간 결탁은 중국에서 사업하기 위해 응당 받아들여야 하는 관행으로 치부되었다. "그때는 유휴 부지가 정말 넘쳐 났습니다." 시옹은 부동산 호황과 함께 부자가 되었다.
2002년 시옹은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부자들의 자산을 관리하는 웰스 매니저wealth manager들이 쫓아다녔고, 카지노는 그를 라스베이거스로 데려오려고 전용기를 준비했다. 그는 부동산도 중국의 민주화에 기여하는 동력이라고 믿었다. 리루를 만난 것은 골프장에서였다. 두 사람은 전직 언론인 출신 망명자 호핀Ho Pin이 설립한 중국어 미디어 웹사이트인 두오웨이Duowei에 함께 투자했다. 두오웨이는 민주화된 중국에 진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비판적 언론을 표방했다. 중국에서는 이 웹사이트 접속이 금지되었지만, 여러 특종을 보도하며 중국 정부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타국의 내각에 해당하며, 5년마다 열리는 당 대회를 앞두고 극비리에 진행되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위원 명단을 두 번이나 정확하게 맞혔다.
2013년 5월 8일 뉴욕에서 열린 손 인베스트먼트 콘퍼런스에서 발언하는 리루 히말라야 캐피털 창업자 겸 회장. © Brendan McDermid/Reuters
2013년 5월 8일 뉴욕에서 열린 손 인베스트먼트 콘퍼런스에서 발언하는 리루 히말라야 캐피털 창업자 겸 회장. © Brendan McDermid/Reuters
 
시옹은 이것을 중국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으로 여겼다. 중국 내 언론보다 더 비판적인 목소리를 원하는 수백만 명의 재외 중국인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리루는 두오웨이를 좋은 투자처로 여겼다(히말라야 캐피털과 특수관계인의 두오웨이 모회사 지분율은 50%에 약간 못 미쳤다).
2008년 4월 두오웨이의 최고 경영진은 정례 이사회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시옹은 우한에서 전화로 회의에 참석했다. 음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는 지분을 매각하겠다는 리루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시옹은 충격을 받았고, 리루에게 그가 보유한 지분을 자기에게 팔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리루는 친정부 성향의 언론 재벌인 위반호이Yu Pun-Hoi에게 지분을 넘겼다. 시옹은 리루가 월트스트리트의 대중국 통로로서 자기 위상을 강화하려고 위반호이에게 지분을 팔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히말라야 캐피털의 대변인은 두오웨이 지분을 매각한 결정은 벤처캐피털 펀드의 단계적 축소 과정의 하나일 뿐이었다고 일축했다. 위반호이가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했기에 거래했을 따름이라고 말이다.
이후 수년이 지나면서 자유무역이 중국의 민주화를 앞당길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시진핑 주석은 포퓰리즘에 가까운 반부패 척결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정재계의 적을 숙청하며 자기 권력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2018년 그는 임기 제한마저 폐지했다. 중국 정부가 대만에 공격적인 외교 및 군사 정책을 펼치고 자국 내 소수민족을 계속 탄압하면서 서양 정부와 기업은 중국과 거리를 두었다. 시장자본주의를 일부 수용한 중국은 더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가 되었지만, 결국 더 권위주의적인 독재국가가 되는 데도 성공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두오웨이는 본사를 베이징으로 이전했다. 여전히 중국에서는 웹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었지만, 정권과 관련한 보도의 논조는 더욱 신중해졌다. 지난해 두오웨이는 재정난을 이유로 사업을 중단했다.
 
 
2010년 9월 말 선전의 BYD 공장을 촬영한 다소 흐릿한 사진이 홍콩 신문에 실렸다. 미국에서 온 유명 인사 뒤로 회사 셔츠를 입은 BYD 경영진과 정부 관료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었다(아래 사진 참고, 역자 추가). 가장 앞줄에는 캐주얼한 차림의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워런 버핏, 찰리 멍거가 앉아 있었다. 한쪽 끝에는 짙은 선글라스를 쓴 리루도 있었다. 이번 탐방을 보도한 언론은 대부분 버핏의 사진을 실었지만, 중국 국영 매체는 리루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중국 정부가 천안문 사태와 관련해 지명 수배한 21명 중에서 재입국을 허용한 첫 번째 사례였다.
맨 앞줄 오른쪽부터 빌 게이츠, 워런 버핏, 찰리 멍거. 맨 앞줄 왼쪽 끝이 리루.
맨 앞줄 오른쪽부터 빌 게이츠, 워런 버핏, 찰리 멍거. 맨 앞줄 왼쪽 끝이 리루.
 
중국은 해외 투자 유치에 전념하는 중이었는데, 해외 투자자 중에서 게이츠와 버핏보다 중요한 사람은 사실상 없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막강한 권력을 가진 미국의 협력자가 리루도 탐방에 동행하도록 중국 정부에 로비했고, 덕분에 순조롭게 탐방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리루가 언론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미국 억만장자와 중국 정재계 대표자 사이에 앉은 리루는 그가 20년 전에 말했던 가교자처럼 보였다.
리루에게도 그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우선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투자처인 BYD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탐방에 동행한 사람에 따르면, 중국의 권위주의 정권은 여전히 굳건했는데도 리루는 조국이 경제적으로 변화한 모습을 보고 중국 정부를 향한 자신의 (변화한) 태도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민주화 시위가 개혁을 가속했습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요구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대다수 사람의 삶의 질이 향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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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더 이상 혁명가가 아닙니다. 그는 자본주의자입니다. 그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자본주의자도 없을 것입니다. 찰리 멍거,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
 
이후에도 리루는 여러 번 중국에 방문해 기업을 탐방하고 베이징의 명문대에서 가치 투자를 주제로 한 강연을 했다. 2014년 마이크로블로그 웹사이트인 웨이보Weibo에 가입한 그는 중국의 발전을 논하며 "뛰어난 실행력과 혜안"을 갖춘 집권당이 전례 없는 경제 성장 달성에 기여했다고 썼다. 그는 중국 기업 및 금융계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시대에 태어나 중국과 미국에서 모두 성공한 입지적 인물로서 추앙받았다. 2019년 리루는 베이징대학교에서 가치 투자를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30년 전 그가 목숨을 걸고 정치적 변화를 울부짖었던 그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중국에서 그는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했다. 학생 시절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투자 서적을 집필하고 중국의 근대화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말이다.
왕단에게도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리루와 나눴던 우정은 이제 먼 이야기가 되었다. 클린턴 행정부가 그의 망명을 허가한 후 왕단은 학자가 되었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 머물던 시절 한동안은 리루와 친하게 지냈고, 만나서 중국 민주주의의 전망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는 리루의 두 번째 결혼식(상대는 리지에Li Jie)에 신랑 들러리를 서기도 했다. 하지만 왕단이 교수직을 위해 대만으로 가면서 두 사람은 멀어졌고, 리루가 중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를 빼고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메릴랜드의 자택에서 전화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왕단은 이렇게 말했다. "리루는 중국 정부에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는 무엇이든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은 전혀 도덕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리루가 이룬 부는 천안문 광장의 시위 덕분에 얻은 것입니다. 아주 큰 이득을 보았죠. 당시 학생들을 학살한 정부의 편에 서는 행동은 전혀 도덕적이지 않습니다."
왕단은 중국 정부 역시 리루의 '변화'에서 정치적으로 큰 이득을 보았다고 믿는다. "중국 정부로서는 1989년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그것이 실수였다고 인정하는 증거물이 필요합니다." 시옹의 비판과 같은 논점이다. "그 선전물로 리루를 활용하는 것이죠." 이번 취재에 응한 후 왕단은 성희롱 혐의로 국립타이완대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리루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소식통에 따르면 리루가 자금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은 컬럼비아 재학 시절부터 올린 투자수익 기록 덕분이었다. "뛰어난 수익을 올렸기에 히말라야 캐피털을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이지, 학생 시위대 출신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리루의 사고방식은 확실히 변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기 정체성을 망명자가 아니라 이민자에 두게 되었다. 그의 생각을 잘 아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계속해서 자신을 정치적 망명자라고 여기면 삶이 더 비참해집니다. 현실의 한편에서 중국을 여전히 조국으로 여긴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말이죠. (중략) 그런 삶은 쉽지 않습니다." 멍거의 말도 들어보자. "그는 변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크게 성공할 방법을 찾고 있었죠. 그는 더 이상 혁명가가 아닙니다. 그는 자본주의자입니다. 그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자본주의자도 없을 것입니다."
 
 
시애틀 중심부의 고층 빌딩 21층에 자리 잡은 히말라야 캐피털의 사무실을 방문하는 사람은 마치 도서관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쪽 구석에 위치한 로잉 머신을 제외하면 사무실에서 대형 금융기관이 으레 과시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애널리스트 머리 위로 블룸버그 단말기가 우뚝 솟아 있지도 않고, 경제 채널로 맞춰둔 TV도 없다. 히말라야 캐피털은 2007년 월스트리트를 떠나 멍거와 더 가까운 지역인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로 이전했다. 이후 2018년 세율이 낮은 워싱턴주로 다시 이전했다. 이사할 때마다 사무실은 버크셔 해서웨이의 구조를 똑같이 재현했다. 애널리스트 팀이 몇 안 되는 기업을 상세히 분석해 중앙 의사결정권자에게 보고하는 방식을 용이하게 하는 구조였다. "우리는 모두 리루의 투자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존재합니다." 히말라야 캐피털의 COO이자 리루 다음으로 오랜 세월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장징Chang Jing의 말이다.
현재 히말라야 캐피털의 운용자산 규모는 140억 달러다. 처음 미국 언론의 조명을 받았던 시절과 달리 리루는 이제 신규 투자자를 유치하려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이미 고액 자산가와 연기금을 통해 히말라야 캐피털이 투자할 수 있는 자금을 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투자자 대다수는 전 세계 최고의 가치 투자자가 모이는 오마하의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 매년 만난다. 리루는 자기 재산 대부분을 히말라야 캐피털의 펀드에 투자하고 있다. 펀드 실적을 좌우할 결정적인 투자는 여전히 BYD 투자다.
요즘 리루는 군중 속에 있기보다는 혼자 있는 고독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를 개인적으로 아는 이들은 독서를 향한 그의 열정이 어마어마하다고 말한다. 그는 오전에 회의보다는 연차보고서와 경제 뉴스를 읽는 데 시간을 쓰고 싶어 한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 찬 집무실에서 그는 애널리스트를 한 명씩 불러 투자 아이디어를 논의한다. "히말라야 캐피털은 리루가 교수이고 제가 조교이며 애널리스트가 학생인 학교와 비슷하다는 농담을 자주 합니다." 장징의 말이다.
최근 미중 관계가 악화하면서 월스트리트가 친중 성향을 드러내기가 한층 어려워졌다. 미국의 일부 대형 연기금은 중국 투자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자금을 회수하고 있다. 미국 최대 기업의 경영진은 이러한 긴장 상태를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 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때가 많을 것이다. BYD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에서 승용차를 판매하지 않는다. 리루를 포함한 학생 운동가들이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미국 정부에 로비한 지 30년이 지났고, 일부 성과가 있었다. 리루가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은 팬데믹이 일어나기 직전인 2019년이었다.
하지만 리루의 생각을 잘 아는 사람들은 양국의 운명이 지금만큼 서로 얽혀있던 때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한에서 코로나19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리루는 태평양을 사이에 둔 양국의 인맥을 총동원했다. 우선 미국에서 중국으로 의료 물품을 보낸 후 BYD가 미국에서 마스크를 판매하도록 연줄을 놓았다. 코스트코에서 마스크를 구매한 수백만 명의 미국 소비자는 자동차 회사가 아닌 의료 제품 브랜드로서 BYD의 원형 로고가 더 친숙했다.
히말라야 캐피털의 IR 총괄인 캐롤라인 킴Caroline Kim에 따르면, 리루는 매일 점심 화상으로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국에 가족이 와 있지 않은 직원들을 몹시 걱정했습니다. 그들을 가족처럼 여기는 듯했습니다." 이후 리루는 아시안 아메리칸 재단을 공동 설립했고, 11억 달러를 모금하여 팬데믹 이후 고조된 반아시아 인종차별에 대응하는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올해 57세인 리루는 평생의 절반 이상을 미국에서 보냈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지 거의 30년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100% 미국인인 동시에 100% 중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집에 카우보이모자도 있는 그는 자기를 부자로 만들어 준 아메리칸드림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리루의 삶을 대다수 이민자와 비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그 여정을 시작한 역사적인 상황이나 궁극적으로 도착한 곳의 위상을 고려한다면. 리루는 직원들과 있을 때도 자신의 과거에 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장징에 따르면 과거는 "그의 인생사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회고록에서 리루는 그와 동료 혁명가들이 천안문 시위 50주년에 그 광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썼다. "손주들을 서로 소개하고, 그간 썼던 일기장도 돌려볼 것이다." 하지만 왕단과 왕준타오, 차이링을 포함해 그때 타국으로 망명한 혁명가들이 30여 년 전 약속을 지키려고 해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중국 땅을 밟을 수 있는 사람은 리루뿐이다. 그 약속을 지키고자 했다면 리루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했을까? 그는 2016년 국립 미국 역사박물관의 구술 역사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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